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그날 이야기 !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꼬꼬무) 시즌2
16회 방송은 <정치깡패 이정재> 편입니다.
6월 24일 밤 10시 30분에 방송 됩니다.
<시라소니 린치사건>의 배후 "이회장"
때는 1953년 8월!
장소는 동대문
이곳에서 끔찍한 폭행 사건이 일어난다.
이 날 37살의 이성순 씨는
후배 ‘이회장’을 만나기 위해
동대문으로 향했다.
약속 장소인 ‘이회장’의 사무실에 들어서니
직원으로 보이는 20여 명의 남성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이 씨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손에는 무서운 도구들이 들려 있었다.
그들은 도끼, 쇠갈고리 등을 들고 있었고
눈에선 살기가 느껴졌다.
이어 비좁은 사무실에서는
갑작스러운 난투극이 벌어진다.
무려 20대 1의 싸움이다.
그러나 우세를 잡은 쪽은 놀랍게도 이 씨였다.
아무런 도구없이 맨주먹으로
20명의 건장한 남성들을
단숨에 제압하는 그의 정체는 바로
조선 최고의 주먹 ‘시라소니’였다.
이날의 이 습격은 ‘시라소니’를
쓰러트리기 위해 기획된 함정인 셈이다.
이 일로 인해 한국 주먹계는
발칵 뒤집어 진다.
기존에 1대 1의 싸움 실력으로
승부를 겨루던 ‘낭만주먹’ 시대를 끝내고
잔혹한 집단 폭행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정치 깡패 이정재가 그 인물이다.
‘이회장’의 이름은 이정재다.
그는 명석한 두뇌를 앞세워
세력을 확장해가며
명실상부한 동대문파의 수장이 되었다.
이때 주먹계를 넘어
‘권력자’가 되고 싶었던 그는
정치인과 손을 잡고
‘권력의 개’가 되기로 결심하게 된다.
대한민국 정치사를 피로 물들인
‘정치깡패’의 탄생을 예고 했다.
협박과 테러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치계를 휘젓던 이정재.
심지어 주먹계 큰형님이자
국회의원인 김두한에게까지
권총을 들이대며 위협을 가한 일화도 있다.
대한민국의 운명을 바꾼 ‘그날’의 이야기,
주먹과 정치의 추악한
콜라보 ‘정치깡패’ 이정재의 탐욕이
불러온 결말은 무엇이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16회에서는
시라소니의 아들 이의현 목사와
당시 실제 주먹계에 몸담았던 사람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충격적인 ‘그날’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방송은 6월 24일 밤 10시 30분.
정치 깡패로 불리는 이정재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자.
[이정재 프로필]
생년월일 : 1917년 1월 일
고향 : 경기도 이천군 호법면 유산리
키 : 180cm
학력 : 중앙고등보통학교, 휘문고등보통학교
가족 : 아내 김씨, 아들 이정수, 딸 이미령,
처남 김기홍, 재종제(6촌 동생) 이석재,
사돈 유지광
별명 : 말렌코프, 동 카포네
경력 : 前 화랑동지회 회장, 前 자유당 도시행정특보위원,
前 대한민국 씨름협회 회장
[이정재(조직폭력배) 주먹 세계에 입문]
경기도 이천 출신으로
어렸을 때 부터 힘이 굉장히 셌다고 한다.
마을 씨름 대회에서 우승하여
상품으로 황소도 받았다.
중앙고등보통학교를 다니다가
휘문고등보통학교로 전학해 졸업했다고 한다.
처가살이를 하던 도중
동대문에서 광목 장사를 했으나
얼마 후 한 깡패와 시비가 붙자
그 깡패를 씨름 기술로 들어 메친걸 계기로
김두한의 부하로 주먹 세계에 입문하게 된다.
[ 이정재(조직폭력배) 가족회 조직 결성]
" 막대한 수입 거두어"
김두한의 정계 진출을 발판삼아
종로의 조직이 사실상 정리된 후
시장 점포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조열승과 차석환을 포섭하여
'가족회'라는 조직을 결성하게 된다.
6.25 전쟁 이후로 파괴된
시장의 중심지 일대 3,000평을
광장주식회사로부터 매입, 점포를 짓고
상인들을 입주시키고
상인들을 모두 '가족회'의 회원으로 가입시켰다.
이렇게 점차 자신의 세력을 강화시킨 그는
상인들의 인심을 얻기 위하여
과거 건달들이 폭력 행위, 협박, 공갈로
상인들에게 금품을 뜯는 폐단을 없애기도 했다.
상인들이 어려워하는 문제가 생기면
본인이 나서서 해결해주는 등
상인들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광장주식회사로부터
헐값에 거둬들인 땅을
상인들에게는 고가에 판매하여
폭리를 취하기도 했다.
시장의 전기, 전화 관리세에
자가 발전을 핑계삼아
당시 가구당 300환에 불과하던 관영 요금을
2,000환~2,500환까지 거둬 들였고
전화기 교환을 핑계로
7,000환을 부과하는 등
막대한 이익을 취하기도 했다.
이러한 내막을 모르는 상인들은
이정재의 평판은 좋을 수밖에 없었다.
이정재는 학식이 있는 인물답게
몰래 돌려 삥을 뜯어온 것이다.
이정재의 세력은 날이 갈수록 거대해지면서
경마장에까지 손을 뻐쳤다.
그 규모는 종로 4가에서 종로 6가까지
7만평 규모에 2,900여 점포에 해당된다.
이정재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상인의 수는
1만 2천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당시 혼란한 시대상으로 인해
상당수의 총기를 보유하기도 했다.
거대한 이권을 쥐게 된 이정재는
동대문 광장 입구에
1억환(현 시가 50~100억원)에
3층 건물을 짓고
옥상에 도장을 설치하여
많은 부하들을 육성했다.
[이정재(조직폭력배) 시라소니 린치 사건]
시라소니가 이정재에게 돈을 몇 차례 빌리고
전직 북파공작원 KLO 대원들에게
점포를 양도해줄 것을 요구했다.
또한 50만환(현 시가 5천만원 전후)에
달하는 돈을 요구하고
서북청년회 출신 상이군인들에게도
점포를 배당해줄 것을 요구하자
동대문파 간부들은 이에 분노했다.
여기에 자존심이 상한 이정재는
시라소니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고
좁은 사무실로 유인하여
둔기와 손도끼 등의 흉기로 난자한
일명 '시라소니 린치 사건'을 벌였다.
이 일이 계기로 이화룡의 명동파와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다.
이정재는 씨름꾼 출신이라 힘은 굉장히 세지만
싸움 실력은 떨어졌다.
부산 깡패 5명에게 구타당하고 있는 이정재를
때마침 나타난 시라소니가 구해주었고
이정재를 납치하였던 켈로부대원은
4명이었다고 한다.
[이정재 행보 및 생마감]
서울특별시 내 지지율이 바닥이었던 이기붕이
수도권이면서 만만한 지역구를 물색하던 도중
하필 이천을 선택하게 되었고
이런 이기붕에게 이천 지역구를 반강제적으로 빼앗겼다.
이 때 이기붕과의 마찰을 계기로
이정재는 이기붕의 아내 박마리아의 미움을
받게 되었고
치솟던 이정재의 권력도
이 때를 기점으로 내리막길을 걷게 됐다.
이후에 이름만 1인자 자리를 유지한 채
권력을 잃은 이정재는
자택에서 칩거하게 되었고
이 틈을 타서 처세의 달인 임화수가
실질적인 동대문파의 1인자로 부상하는 계기가 된다.
그러던 중 박정희가 주도한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고
군사 정부의 조직폭력배 척결 사업 대상으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
당시 군사 정부는 시라소니 린치 사건,
단성사 저격 사건,
고대생 습격 사건 등과 함께
이정재가 관여한 수많은 범죄를
재수사해서 혁명재판에 넘겨지게 된다.
결국 1961년 5월 21일 혁명재판부에서
특수범죄처벌에 관한특별법 제7조 1항(단체적 폭력 행위) 외
11개 범죄 행위로 기소되어
범죄 단체 수괴로 인정되면서
사형 판결을 받는다.
판결 이후 공수특전단 대원들의 감시를 받으며
이런 플랜카드를 들고 거리를 나온다.
'나는 깡패입니다. 국민의 심판을 받겠읍니다'
결국 1961년 10월 1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향년 44세에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사형당하기 전에 남긴 유언은 아래와 같다.
"나도 잘못은 있기에 억울하다는 말은 안 한다.
그런데 죄다 나에게만 책임을 넘기고
자신은 억울하다는 이들이 있다.
그들에게 적어도 자기 잘못은
인정하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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